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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개표를 조작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다.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하면서 영구집권(永久執權)을 꾀했던 이승만(李承晩)과 자유당정권(自由黨政權)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비합헌적(非合憲的)인 방법으로 헌정체제(憲政體制)의 변혁과 정권교체를 결과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革命)으로 규정하여 이를 4월혁명, 4·19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김영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

간접원인

4·19혁명을 초래하게 된 근본원인은 종신집권을 노린 대통령 이승만의 지나친 정권욕과 독재성 및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평불만이 누적된 데 있다. 이승만은 환국(還國) 이후 다른 어떤 민족지도자보다도 가장 두터운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얻었을 뿐 아니라 탁월한 수완으로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국민적 신망은 그에게 ‘나밖에 없다’는 오만과 카리스마적 권위의식을 가지게 하였고, 또한 이것은 그의 끝없는 정권욕과 독재성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자신의 종신집권과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숱한 정치파동과 정치적 비리를 저지름으로써 점차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그는 6 ·25전쟁 발발 직후 서울 사수(死守)를 공언하고도 자신과 정부는 피난감으로써 국민을 배신하였다. 또한 ‘국민방위군사건(國民防衛軍事件)’으로 많은 청년들을 희생시켰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집권을 위해 일대 정치파동을 일으켜 국민의 원성을 사기 시작하였다.

1952년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위한 정치공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체포, 연금하여 위협하는가 하면, ‘백골단(白骨團)’ ‘민족자결단(民族自決團)’ 등 정체불명의 단체가 나타나 국회의원들을 협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개헌을 반대하는 의원들의 지역구에서는 난데없이 국회의원을 성토하며 사퇴를 외치는 군민대회가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하였다. 당시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으로 불리는 일련의 정치테러 사건과 이때 통과된 ‘발췌개헌(拔萃改憲)’으로 이승만에 대한 국민의 신망은 더욱 떨어졌다.

1954년 11월 이승만은 재차 자신의 종신집권을 위해 헌법의 중임제한(重任制限) 조항을 없애는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시켜 이른바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이라는 기상천외한 개헌을 단행하였다. 당시 개헌안이 가결되기 위해서는 재적 국회의원 203명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36표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했는데, 투표결과 찬성이 135표에 그쳐 부결된 것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재적의원인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명이므로 이를 사사오입하면 135명이라고 하면서 전날의 부결을 뒤집고 가결된 것으로 정정 선포함으로써 사사오입개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56년 5·15정부통령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되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나,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신익희(申翼熙)가 급서(急逝)함으로써 그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자유당은 선거법에 언론규제규정을 삽입한 ‘협상선거법(協商選擧法)’을 통과시켜 부정선거를 고발하는 언론을 봉쇄해놓고 관권에 의한 부정선거를 공공연히 자행하였으나,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追慕票)가 20%에 달하였고 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張勉)이 당선됨으로써 민심의 소재가 분명히 밝혀졌다.

그리고 1958년 12월 자유당은 국회의사당에 무장경찰과 무술경찰을 배치하여 반대하는 야당의원들을 완력으로 막고 ‘2·4보안법파동(二四保安法波動)’을 일으켜 언론규제와 야당탄압을 강화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1959년에 이르러 자유당 정권은 야당계 언론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몇 차례의 필화사건(筆禍事件)으로 기자를 구속했으며, 정부를 비판하던 《경향신문(京鄕新聞)》을 폐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이승만과 자유당의 극에 달한 온갖 정치적 비리가 4·19혁명의 간접적 원인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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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과정

1960년 4월 19일 서울 시내 각 대학 학생들이 미리 약속했던 계획에 따라 각 대학에서 총궐기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중앙청을 향해 행진하였다. 그 선언문도 4 ·18 고려대 선언문과 맥락(脈絡)을 같이하는 것으로 “학생들은 더이상 현실을 좌시할 수만은 없으며 정의와 민주수호를 위해 궐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자극된 수많은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하였다.

경찰이 경무대(景武臺)로 통하는 효자동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이승만과의 면담을 원하는 학생들의 요구를 무시한 채 무차별 발포를 하여 사상자가 늘어가자, 시위 군중은 더욱 흥분하여 경찰 지프차를 탈취하여 불사르고, 경찰서와 파출소를 파괴 ·방화하였다. 또 일부 시위군중은 자유당정권의 전위부대의 하나였던 서울신문사와 반공청년단(反共靑年團) 본부, 그리고 자유당 본부 등을 습격하여 불태우거나 파괴하였다. ‘서대문경무대’로 알려진 이기붕의 집도 습격하였으나 이 곳에서는 정치폭력배들이 시위 학생들을 몽둥이로 살상까지 하였다.

서울 시내는 완전히 무정부상태였고, 모든 질서는 회복할 수 없는 수라장이 되었다. 이 날의 구호는 “3 ·15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 독재 물러가라”, “이 대통령은 하야하라” 등 독재규탄과 민주수호 및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오후 3시를 기해서 서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을 진주시켰다. 사망자 약 100명에 부상자 약 450명에 달한 엄청난 희생을 가져온 시위는 계엄군의 진주로 다음날부터 일단 멈췄다.

그러나 4월 23일 서울시 주관으로 4 ·19희생자에 대한 합동위령제(合同慰靈祭)를 올리자 일제히 이에 반발, “어용(御用) 위령제는 4 ·19희생자에 대한 모독이다. 학생들이 주최하는 위령제를 다시 거행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한편, 4월 23일 부통령 장면이 정부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사퇴하자, 이기붕도 자신의 부통령당선을 사퇴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하고, 이승만도 자유당총재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그러나 결코 정부통령선거를 다시한다거나, 대통령직을 사퇴한다는 의사는 밝히지 않았다.

이러한 자유당의 미온적인 태도에 국민들의 분노가 다시 일기 시작하였고, 4월 25일 서울의 각 대학 교수 259명이 “대통령 이하 3부요인(三府要人)들은 3 ·15부정선거와 4 ·19사태의 책임을 지고 즉시 물러나는 동시에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라”는 내용의 시국선언문(時局宣言文)을 채택하고, 구속학생의 즉시석방을 요구하면서 시위에 나섰다. 이 날의 교수 시위는 자유당정권 퇴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일반군중들은 계속해서 야간 시위를 벌이며 “자유당정권 물러가라”고 외쳤고, 4월 26일에는 다시 학생들이 거리를 메워 태평로는 4 ·19 때와 같은 혼란이 거듭되었다.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계엄사령관 송요찬(宋堯讚)이 주선하여 학생과 시민대표 5명이 이승만과 면담하고 시국수습을 위한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고, 3 ·15부정선거는 다시 한다. 또한, 이기붕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 동시에 내각책임제 개헌을 한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어 11시 이승만은 방송을 통해 직접 하야의 뜻을 밝히고 다음날 정식으로 ‘대통령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4월 28일 이기붕 일가(一家)가 경무대의 일실(一室)에서 자살하였음이 확인되었고, 5월 29일 이승만은 극비리에 하와이로 떠났다. 결국 이승만이 이끈 자유당의 12년간의 장기집권은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였고 새로운 공화정을 위한 준비를 위해 허정(許政) 과도정권(過渡政權)이 뒤를 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4·19혁명 [四一九革命]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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